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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당원으로 국민의당의 경전을 읽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 분명 뻔한 표현이다. 그래도 가정 한 가지를 해보려한다.


  만약에 군부독재의 학살이 5월 광주에서가 아니라, 그보다 7개월 전 부산-마산 지역에서 일어났다면 어땠을까? 분명 그 가능성은 존재했다. 당시 유신정권은 분명한 한계에 봉착했고 부산에서 시작된 시위는 확산되어 계엄군의 진압으로야 잠시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공수부대가 투입 되었으며 박정희는 총기사용을 허가했고, 차지철은 당시 3년 전에 벌어졌던 캄보디아 킬링필드를 운운하며 우리는 100~200만 희생시키는 것쯤 문제겠습니까?”라고 이야기했다.

 다행히 박정희 암살과 함께 유신 정권이 막을 내리면서, 그러한 가능성은 실현되지 않았다. 대신 새로이 정권을 잡은 전두환 신군부는 광주에서 수천 명의 피해자를 내며 군인이 자국민에게 총을 발사하는 학살극을 벌였다. 그 이후로 대한민국 한편은 광주에 대한 부채의식에 시달리며 살아가게 되었으며, 그렇게 5월 광주는 역사의 장으로 남게 된다.

 그런데 만약 부마에서 이러한 학살이 더 일찍이 벌어졌다면 대한민국은 지금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을까? 그렇다면 지금처럼 영남 지역과 결합한 보수 세력은 유지되기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3당 합당과 같은 일은 부산 출신 정치인 김영삼에게 부담이었을 것이고, 부산-마산 지역은 민주화의 성지로서 또한 시대정신으로서 남았을 것이다. 어쩌면 오히려 뿌리 깊은 지역갈등이 방향을 바꿔서 충청이나 호남이 보수 세력의 텃밭이 되고 영남은 이런 구도에서 고립될 시나리오도 상상할 수 있다. 하지만 영남은 다른 지역에 비해 인구가 많다는 변수가 남아있다. 이를 통해 영남에 기반을 둔 가상의 민주화 세력은 지금보다는 더욱 손쉽게 지역 구도를 극복하고 더 빨리 정권을 창출하는데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비록 지금보다 우경화 되었을지언정 영남 기반의 민주 세력은 거대 여당으로 역사에 나타날 것이다.

 

 물론 이러한 나의 소설과 같은 가상역사 시나리오를, ‘아주 낯선 상식아주 낯선 선택의 저자 김욱 교수가 듣는다면 콧방귀를 꼈을 것이다. 아마도 그에 따르면 이런 시나리오는 아예 존재가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다시, 역사에 만약은 없다. 이러한 시나리오는 ‘5월 광주에 대한 공부의 부족함에 불과하다. 다음은 그의 글이다.

 

있었던 사실만을 놓고 말하자. 전두환, 정호용 등 반란을 일으킨 영남패권군부가 호남 양민 학살을 통해 권력을 훔친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객관적 사실이다. 당시 공수부대 장교가 전라도 새끼들 40만은 전부 없애버려도 끄덕없다는 대화를 아무렇지도 않게 지껄일 정도면 당시 광주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알고도 남는 일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차마 사실이라고 말하기가 두려워 적당히 딴소리를 하고 있는 것뿐이다

 

우리는 5.18은 호남지역 중심으로 이뤄진 반영남패권주의 투쟁이었으며, 이후로도 오랫동안 호남의 5.18은 수도권지역을 비롯해 대한민국의 여타 모든 지역으로부터 고립되고 외면받았으며, 지금도 최소한 영남패권세력으로부터는 사과는커녕 조롱까지 받고 있다고 있는 그대로의 역사를 기술할 수가 없는 것이다




김욱 교수에 따르면
, 정확히 그곳이 광주였기에 학살은 벌어졌다
. 그렇기에 부마항쟁이 학살로 끝날 과거를 가정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설령 유신정권이 그러한 학살을 벌였다 하더라도, 그것을 계기로 정치적 상징성을 갖고 영남이 민주화 세력의 기반이 된다는 나의 시나리오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광주학살의 본질 자체가 단순히 보혁갈등이 아니라, 영남패권에 대한 호남의 저항이었기 때문이다. 

아주 낯선 상식아주 낯선 선택두 권을 통해서 김욱 교수가 말하고 있는 핵심주장은 대한민국이 영남패권주의 사회라는 것이다. 비록 민주화 이후에 패권의 작동 방식이 섬세해지고 제도화되긴 하였지만 본질 자체는 변하지 않았다. 이를 부정하기에는 쉽지 않다. 1961년 박정희 쿠테타 이후 지금까지 55년의 역사에서 김대중을 제외하면 모든 대통령은 영남 출신이었다. 또한 관료, 재벌, 정치인 등 사회의 최고위 이너서클에서 영남 출신은 압도적으로 많으며 분명 그들만의 사회를 이루고 외부인을 배제한다.

이러한 몇몇 보도에 따르면 김욱 교수의 책은 출간되었을 때부터 새정치민주연합 내의 특정 그룹에서 널리 읽혔고, 국민의당으로 분당 되는데 도화선 역할을 해왔다고 알려졌다. 따라서 지난 총선에서 가장 뜨거운 정치 서적이었으며, 그의 이론과 사상이 국민의당이라는 실험을 통해서 어떻게 현실과 조응할 것인지도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총선의 결과는 분명 의미 있었다.

대한민국이 영남패권주의 사회이며, 이에 호남이 저항해왔으며 정당하다는 그의 주장이 대두되자 많은 비판이 있어왔다. 비판들을 주도했던 논객들과 정치인들은 보통 친노라고 부르는 세력이거나 진보주의자들이었다. 김욱 교수는 약간은 과할 정도로 그의 책 내용 대부분을 비판자들에게 반론하는데 사용하고 있다. , 이 책들의 대상은 그의 영남패권주의 세계관 안에서 가해자가 아니다. 피해자를 탓하거나 침묵하는 사람들이다. 다음의 인용문이 따라서 핵심이다.

 

예컨대 노동자는 자본가 지배에 맞서 공평한 세상을 이루기 위해 투쟁하는 것이지 거꾸로 자본가를 지배하기 위해 투쟁하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식민지 조선은 독립을 위해 싸운 것이지 일본제국을 식민지 삼기 위해 싸운 것이 아니지 않은가? 이 세상의 부당한 다수로부터 지배받는 모든 소수-약자의 투쟁이 정당한 건 그들이 다수를 지배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부당성에 저항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독 호남만 다수를 지배하기 위해 투쟁한다고 본다는 말인가?”

 

진보주의자라면 이미 김욱 교수의 주장에 대한 분명한 비판논리를 알고 있다. 의심스럽지만 지역모순이나 영남패권주의가 설령 존재하더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근본 모순이라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대다수의 평범한 대한민국 국민들은 열악한 노동조건에서 살아가야만 한다. 또한 분단국에서 산다는 이유로 너무 쉽게 기본권을 침해받으며 소수자들은 사회의 각종 차별에 노출되어 있다. 가끔은 국가가 우리의 생존권을 보장해준다는 약속이 진실인지까지 의심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나 고향이 전라도이건, 경상도이건 상관없이 모두 마찬가지이다.

현실정치에서 분명하게 보이는 지역구도는 그렇기에 민중과는 괴리된 갈등이다. 지역갈등이 현실정치에서 중요하게 작용하듯 보이는 건 선거제도가 소선거구로 운영되고 기득권에 의해서 과장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진짜 모순과 갈등이 감춰지게 된다. 이것이 영남지역 노동자들이 보수정당을 압도적으로 지지하는 현실을 보며, 진보주의자들 사이에서 흔히 말해지는 설명이자 논리였다.

  그렇기에 지역모순의 해결을 이야기하는 호남의 목소리에 진보진영은 비판적이었다. 김욱 교수의 사상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여겨지는 국민의당에 정의당이 가지고 있는 심리적 거리감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이에 김욱 교수는 진보진영이 도그마에 빠져있다고 비판한다.

 

나는 영남패권주의에 대한 목소리를 높이고 있지만 단 한번도 세상을 지역모순으로만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 적은 없다. 세상의 모순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그런데 도대체 무슨 이유 때문인지 계급환원주의자들은 이 세상의 모순을 그들의 관념 속에서 극단적으로 단순화시키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그들은 지역모순을, 즉 영남패권주의를 주요 모순으로 상정하면 격렬한 히스테리 반응을 보인다

 

현대 진보주의자라면 모두 사실상 마르크스가 말한 각양각색의 보잘것없는 개량주의자들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노동계급 진보세력은 현대사회의 중층적 모순 속에서 자신들의 운동을 정립해야만 한다. 어디선가 주입된 계급운동 도그마의 도덕적 우월성에 빠져 다른 진보적 생각을 폄훼하거나 심지어 적대시 하는 건 이론적 나태함의 소치일 뿐이다

 

 민주주의에서 정당은 갈등에 뿌리를 두고 존재한다. 종류와 결이 다양한 모든 갈등이 충돌하는 사회는 생존할 수 없기 때문에, 정당은 가장 중요하게 생각되는 갈등을 선택해서 공적으로 만드는 역할을 한다. 그렇게 사회는 혼란과 분열로 파편화되는 것을 피해 정치적 해결이란 답을 찾을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유능한 정당이란, 의미 있는 갈등을 찾아내고 해답을 제시하고 지지자를 결집시키는 정당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갈등의 본질이 명확해지고 요구가 분명해지게 된다. 이런 과정이 없다면 정당정치는 스포츠 팀 경기와 다를 것이 없다.

 이제 내가 이 글을 통해서 묻고 싶은 질문은 이것이다. “왜 정의당은 제3당의 자리를 국민의당에게 내주게 되었을까?” 물론 일반적인 대답 역시 널리 퍼져있다. 유사양당 구조에서 제3당 전략을 사용하기에 정의당보다는 국민의당이 더 적합했기 때문이다. 정의당은 진보정당이기에 전선 자체를 왼쪽으로 움직여야 했다면, 국민의당은 그저 중립적인 스탠스를 취하는 것으로 충분했기 때문이다. 또 다른 대답도 있다. 국민의당은 호남지역주의에 결합하는 방식을 사용했지만 정의당은 도덕적인 이유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한 대답인지는 의문이 든다. 국민의당을 무이념 정당으로 판단하고, 오직 정치공학의 결과라고 여기는 것은 쉽다. 하지만 그것은 정치를 스포츠 팀 경기로 보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또한 현실 정치에 참여자가 분명 존재했던 이길 수 있는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는건 결코 자랑은 될 수 없을 것이다.


 지난 총선에서 정의당이 택한 3대 목표들은 다음과 같다. ‘노동’, ‘청년’, ‘호남’. 이는 정의당이 선택한 사회 갈등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 갈등에 대해서 정의당은 유능한 정당이었을까? 정의당 총선기획평가팀에 따르면, 여기서 노동은 핵심 전략, ‘청년은 미래 전략, ‘호남은 방어 전략으로 계획되었다고 한다. , ‘노동은 정의당이 근본적으로 해결하려하는 갈등이고, ‘청년은 정의당이 앞으로 제시할 갈등이라는 의미이다. 하지만 호남은 이 분류에서 이질적인데 정치공학적인 목표로 제시되었지만 이와 관련된 유의미한 비전은 말할 수 없다.

 그렇다면 총선 결과는 어떠했는가? 유능한 정당으로서 제시한 목표들에서 충분한 성과를 냈을까? 먼저 노동에 있어서 불완전하게나마 어느 정도 성과를 볼 수 있었다. 비록 민주노동당 시절 보다는 못했지만, 노동자 계층에게서 많은 지지를 받을 수 있었고 지역구로는 창원의 노회찬 의원 당선에서도 기반이 되어주었다. 반면, ‘청년호남이라는 목표는 거의 실패 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2030대 투표율이 큰 폭으로 상승했고 분명한 세대갈등에 기반으로 한 투표구도로 선거가 치러졌음에도 불구하고 지지를 얻는데 실패했다. 청년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대신할 정당으로 차라리 더민주당를 호명했고, 이것은 야권 승리의 원인 중 하나로 분석된다. 하지만 분명 정의당은 청년어젠다를 선점하지 못했다.

 ‘호남이라는 목표 상황은 더욱 심각했다. 호남에서 국민의당이 압승을 함에 따라 정의당 역시 지난 총선에 비해 상황이 더욱 안 좋아졌다. 비례대표 후보였던 윤소하 의원 지역구를 제외하면, 호남 전체에서 다른 지역과 하등 차이가 없는 지지율을 보였다. 그렇게 이전까지 호남에서만 유지하고 있던 제2당 위치도 잃게 되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호남의 제2당의 지위라는 건 결국 새누리당이 배제되었던 지역적 상황 덕분이었지 진보 정당의 어떤 능력 덕분이 아니었다. 호남 역시 자신들의 대표자로 다른 정당을 선택했다. 그 이유는 분명해보인다. 하지만 많은 진보주의자들이 이에 당혹감을 느꼈다. 왜 호남은 진보적이지 않은, 혹은 진보적이지 않게 보이는 선택을 했을까? 호남은 다른 지역과는 달리 보수정당에 반대해왔던 지역이 아니었던가? 이에 대해서 김욱 교수는 진보진영의 이러한 인식에 대해서 책의 한 부분을 할애하여 비판한다.

 

여지없이 광주라는 지역단위에 통째로 그런 진보적-계급적 실천을 요구하는 걸까? 나는 진보가 생각하는 그런 광주 정신을 광주가 얼마나 훌륭하게 실천할 능력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상상을 하게 만드는 것 자체가 바로 문제 아닌가? 웬 지역주의자가 광주라는 지역단위에서 이상적 공동체를 꿈꾼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 진보는 지역단위 투쟁을 무슨 역사의 반동 취급하는 사람들 아닌가?”

 

 아직도 많은 정의당 당원들이 호남에서의 제2당 지위 회복을 말한다. 하지만 그전에 고민해야하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왜 정의당은 호남을 총선에 임하는데 있어서 3대 전략 중 하나로 포함시켰을까? 어떠한 지역이 하나의 정치적 단위로서 규정된다면 그 요구조건 역시 다분히 지역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김욱 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그 요구조건은 분명 영남패권주의 청산이었다. 물론 당연히 김욱 교수의 분석을 따라야할 의무는 없으며, 다른 지역적 요구를 선택해서 공적으로 만들면 된다. 하지만 정의당은 이러한 작업을 거쳤을까?

 호남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지역단위 투표세가 강한 지역이다. 그런데 3대 전략 중 하나로 호남을 지목했으면서, 그들에게 투표할 이유를 주지 않았다면 그것은 분명 유능한 정당이라고 말할 수 없다. 또한 혹시 광주 정신이라는 이유로 호남의 지역적 요구가 진보적 사회 건설이라고 상상했다면 마찬가지로 유능한 정당이라고 말할 수 없다.

 이제는 인정해야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정의당의 한계는 대중적이지 못해서거나, 혹은 반대로 선명성이 없어서라고 말하는 것은 불충분하다. 그것은 김욱 교수의 비판대로 나태함에 있을 수도 있다. 정당이 자신의 유능함을 증명할 수 있는, 자신들에게 알맞는 갈등을 찾아내고 공적화 시키는 일에 능숙하지 못했다. 어쩌면 이는 진보가 정치라는 그릇에 아직도 익숙해지지 못했다는 증거일 수도 있다.

 결국 진보주의자가 정당정치라는 룰에서 명심해야 하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자신이 목표로 삼은 갈등을 분명히 하고, 다른 정치세력에게 그것을 빼앗기지 않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자신이 원하는 형태로 지지자를 상상하는 것은 위험천만하다. 그렇기에 마지막으로 이 책에서 인용할 법할 가치가 있는 구절 중 하나를 쓸 수가 있을 것 같다.

 

내 주장은 어린아이도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 너무나 단순명료하다. 어떤 정당이든, 어떤 후보든, 노동자의 표를 원하면 노동자가 욕망하는 것을, 여성의 표를 원하면 여성이 욕망하는 것을, 호남의 표를 원하면 호남이 욕망하는 것을 실현하겠다 약속하고 실천하게 하라! 그렇지 않은가? 이것이 모두가 알고 있는 민주주의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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